한파가 지나갔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창문에 낀 이슬이 많지 않았다. 추울수록 이슬이 많이 맺히는데 이 정도라면 나는 오늘은 따숩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영상 4도. 밖을 나오니 공기가 좋았다. 다른 계절에서 4도는 매우 추운 날씨였겠지만 겨울은 예외니까. 영하의 날씨를 며칠 겪으니 오늘 같은 날씨는 푸근하게 느껴졌다. 역시 모든 건 상대적인 걸까? 나는 DDP를 가는 전철의 덜컹거림을 느끼며 생각했다.

한때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다. 모든 것은 상대적인 게 될 수 있는가. 나는 대체로 그렇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세상을 살다 보면 우린 수많은 기준을 만나게 되니까. 하다못해 선과 악도 그렇다. 전쟁을 벌이는 두 나라에서의 선과 악은 명확하게 갈릴 것이다.

선은 자국, 그리고 악은 상대국. 그리고 제3국들은 전쟁에 벌인 두 나라 모두를 악으로 규정할지도. 이런 생각을 하니 이 말이 떠올랐다. 물이 반밖에 안 남았네.. 그리고 물이 반이나 남았네?

관점의 차이에 대한 예시를 들 때 많이 쓰이는 말이지만 나는 이 말이 “모든 것은 상대적인 것이다”라는 말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 대만에는 갑자기 기온이 영상 10도 이하로 내려가는 바람에 사람들이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4도의 날씨에 나와 걸으며 따숩다고 느끼고 있다. 참 세상은 알 수 없는 일로 가득한 것 같다.

DDP를 가기 위해서는 환승을 두 번 해야 했다. 환승을 적게 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환승하는 편이 더 빨리 갈 수 있었기에 나는 환승하는 루트를 선택했다. 나는 환승을 여러 번 하는 것은 장점과 단점이 같다고 생각했다. 그건 바로 계속 움직여야 한다는 것.

장점: (계속 움직여야 하니) 지루하지 않다.

단점: (계속 움직여야 하니) 귀찮다.

나는 오늘 전철에 멍하니 계속 있는 것이 지루할 것 같아 환승을 여러 번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차. 나는 계단을 올라갔다 내려갔다 다시 전철을 탔다. 나는 오늘 내가 환승을 즐거워하는 이유가 오랜만에 전시를 보러 가서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DDP에서 열리는 10주년 기념 오픈큐레이팅. 마지막으로 본 전시가 언제였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최근 독립출판할 소설을 쓰느라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연말에는 약속이 많아 글 쓸 시간이 부족했고 연초에는 마음이 안 잡힐 것 같아 약속도 최소화하고 홀로 가는 나들이도 없앴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써서일까. 기분 좋게도 초고가 끝나있었다.

“그래 이제는 퇴고만 하면 된다 퇴고만..”

나는 며칠 전 이렇게 생각하며 밤 11시가 되어서야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또 기분 좋은 다른 이유가 있었는데 그건 바로 새롭게 구성한 영상을 촬영하러 가기 때문이었다. 팟캐스트 구성을 새롭게 바꿀 생각이었기에 나는 그 부분이 기대됐다. 물론 촬영이랄 것도 없는 단순 풍경 클립 따기겠지만 그래도 내가 찍고 싶은 것으로만 영상을 만들겠다는 생각이 내 마음의 부담을 낮춰주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오늘 어떤 영상을 찍을지 굉장히 설레었다.

뭔가 1월은 계획대로 되어가는 부분. 역시 나는 확신의 J일까. 아니면 마음을 내려놓아서 그런 걸까. 어찌 됐든 좋은 기분을 가질 수 있게 되어서 즐거웠다. 아 어쩌면 날씨를 따뜻하게 느낀 이유도 내 기분 때문이었을까. 영상 4도. 나는 잠시 발이 시리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오늘 날씨가 괜찮다고 느끼며 또다시 환승을 했다.

소설 초고가 끝났지만 본 게임은 지금부터였다. 이제 퇴고만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초고의 남은 분량을 썼지만 막상 초고를 털고 나니 퇴고에도 꽤나 많은 에너지가 들어가겠구나 싶었다.

초고를 끝낸 나는 제발 밥을 넣어달라는 배를 붙잡고 잠시 생각을 했다. 초고는 스케치구나. 본 게임은 당연히 퇴고에서 완성되는 것이지. 하지만 내가 그림을 그리려 하는 캔버스가 너무 크기 때문에 초고에서 이미 힘이 부친다는 느낌을 받는 것 같았다. 어쨌든 소설의 기초공사는 마무리 됐으니 탄탄하게 마무리할 일만 남아 있었다.

“꽤나 큰 수확이군.”

나는 밤 11시에 저녁을 만들며 이렇게 생각했다. 왜 글이란 건 꾸준히 일정 분량을 쓸 수 없는 걸까. 난 이 부분이 참 이상하다 생각했다. 몇 자를 채우기 힘든 날도 있는 반면, 어떤 주에는 몇만 자를 며칠 동안 내리 써내기도 했다.

마치 단수가 됐던 수도꼭지에서 갑자기 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 같은 기분. 갑자기 글이 너무 잘 써지면 그 글은 쓰는 이 조차 당황케 만드는 것 같았다. 당황과 어이없음. 나는 이런 날을 마주하면 내가 반칙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아마 다 수련이 부족한 탓이겠지.”

나는 이렇게 생각하며 김이 폴폴 나는 저녁을 책상 위에 던지듯이 놓았다. 혼자 사는 이도 밥친구가 필요하다. 나는 밥친구로 어떤 유부남이 운영하는 요리 유튜브를 틀어놓고 5분 만에 내가 만들어놓은 모든 음식을 다 먹어치워 버렸다.

약간 모자란가. 나는 양이 덜 찼다는 생각에 대용량 과자를 꺼내 우적우적 먹기 시작했다. 영상이 다 끝나면 그만 먹어야지. 영상은 아직 10분 넘게 남아있었고 나는 영상 속 요리들에 군침을 흘리며 과자를 입에 넣었다.

어쨌든 초고를 다 썼으니 잠시 쉬어야겠지. 나는 글을 계속 보면 텍스트가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나는 내 눈과 머리를 내 글에서 잠시 멀리해야 퇴고할 때 글을 새롭게 다룰 수 있었다.

오늘은 8시간 동안 쉬지 않고 글을 쓴 하루였다. 꽤나 높은 노동강도지만 버는 돈은 하나 없는 삶. 과연 내가 쓴 책이 팔릴까? 아 이런 생각은 그만해야지. 단지 내가 좋아하는 글을 쓰면 그만이니까.

남 눈치를 계속 보다간 순식간의 나를 잃어버릴지도 몰라.

순식간의 나를 집어삼키는 세상의 소리들. 그 소리는 비행기가 내는 소음보다도 거대하고 매서웠다. 어쨌든 이렇게 하루가 끝나가고 있었다. 나는 영상이 끝나자 과자 봉지를 닫고 다 먹은 그릇을 설거지했다.

뜨거운 물을 틀어놓은 싱크대에서 김이 폴폴 났다. 그래 내일은 좀 쉬어야지. 우선 따뜻한 물로 씻고 개운한 몸으로 침대에 누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내일은 부디 불안해하지 않고 재밌는 하루를 보낼 수 있길. 나는 물 묻은 고무장갑을 탈탈 턴 뒤 부엌 불을 껐다.

오늘은 신사에 간다. 함부로 방문하기엔 너무 비싼 동네. 하지만 친구 회사가 그 근처기에 나는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신사로 향했다.

이어폰에서는 얼마 전 바 사장님이 알려준 Doechii의 노래. 별 기대 안 했지만 생각보다 좋았다. 요즘 힙합을 안 듣고 있었는데 좋은 아티스트를 발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무엇이든 시도해 보고 경험하는 건 정말 중요한 것 같다.

아직도 새로 기획 중인 영상의 구성을 제대로 잡지 못했다. 왼손으로 쓰는 글씨처럼 알아볼 수는 있지만 너무나 삐뚤거리는 구성들. 나는 그럴 때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내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자세히 들여다봤다.

안경을 안 쓰면 눈을 가늘게 떠야 그나마 보였다. 눈을 가늘게 뜨는 게 수정체를 압축해 주는 효과가 있댔나. 그래서 나는 안경을 안 끼고 걸어가다가 누가 나한테 말을 걸면 눈을 가늘게 뜨고 누구인지를 알아보려 애썼다.

오늘 신사에서는 무엇을 하려나. 오늘은 오랫동안 못 만났던 친구를 만나는 날이었다. 대학 이후 처음 보는 그녀. 대학 때는 허구한 날 보는 사이었다. 왜냐하면 우린 회장단이었고. 학교 앞에 자취를 했고. 그리고 코로나 기간이었다.

할 일을 잃어버린 젊은이들은 할 것을 찾아 떠난다. 그리고 가능하면 기분 좋은 것들을 찾아 떠난다. 그렇게 매일 같이 벌어지는 술판. 그리고 그 술판 장소의 주요 제공자가 그녀였다. 이유는 단순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집이 제일 넓었으니까.

가끔 술을 마실 때면 그녀의 집에서 나던 양초 향이 떠올랐다. 하도 피워대 절여져 있던 향. 정확히 기억나는 건 그 향이 완벽하게 내 취향이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가끔씩 그 향이 생각났다. 그리고 나는 그 향을 떠올리며 이렇게 생각했다.

“아 그때 진짜 재밌었는데.”

스물넷의 아이들은 어느새 20대의 마지막을 바라보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우리를 서른의 문턱까지 끌고 온 것일까? 나는 그녀의 집에서 좋아하지 않는 향을 맡아가며 페트병 소주를 마시던 때와 다르지 않은데.

단순히 코로나가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아이들이 어느새 결혼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집과 자녀. 취업과 이직. 세금과 연금. 그리고 편견과 혐오까지.

“어른들은 참 재미없어!”

문득 어떤 어린아이가 명절에 만난 친척 어른들을 보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러자 이번 달 월세를 걱정하며 단기알바를 뒤지고 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참 재미없다. 도대체 무엇이 우리를 재미없는 어른의 모습으로 끌고 온 것일까? 나는 도저히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교대에서 내려 3호선으로 환승을 해있었다. 곧 신사에 내리겠지. 나는 그녀의 모습이 궁금했다. 똑같이 재미없는 사람으로 변했을까. 아니면 그때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일까. 나는 이 점이 정말로 궁금하다고 생각했다.

그래. 너는 그동안 어떻게 살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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