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작은 자취방은 빨래를 널어놓으면 습기로 가득 찬다. 안 그래도 곰팡이가 많이 피는 집이기에 빨래를 널면 창문을 살짝 열어놓고 자곤 했는데 그래서인지 빨래를 널어놓은 다음날은 유독 피곤했다. 다음날 일어나 온도계를 확인했다. 방 온도는 괜찮았지만 공기가 차갑다. 문득 군대에서 엄청 추웠던 생활관에서 자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름도 무시무시한 백호 생활관. 막사의 가장 외곽에 위치한 생활관이라 외풍이 심했다. 부대가 위치한 곳은 강원도라 겨울이 꽤나 추웠다. 여름보다는 겨울이 낫다고 하던 사람들도 우리 부대에 오면 겨울이 더 싫다고 하곤 했으니까. 전역한 지 벌써 6년. 하지만 방 안에서 찬공기를 느끼니 백호 생활관의 모습이 눈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일병 5호봉쯤 쓰던 생활관이었나. 짬이 적당히 있기에 들어가던 생활관이었다. 밑의 짬들은 어린아이로 취급됐기에 따뜻한 생활관, 위의 짬들은 어르신들이었으니 따뜻한 생활관. 그때는 위아래로 껴있다는 게 꽤나 스트레스였다. 아침에 눈을 뜨면 서늘한 공기와 함께 동기들의 잠을 설친 표정이 보였다. 똑같이 반복되는 하루. 난 그때  전역할 수 있다는 기대를 버리고 살았다. 안 그러면 미쳐버릴 것 같았으니까.

그랬던 내가 이제는 습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창문을 열고 자다니. 나는 2리터 생수통을 들어 입에 물을 쏟아붓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물을 꿀꺽 삼킨 뒤 어제 널어놓은 빨래를 만져보니 역시 축축. 늘 그렇듯 하루 만에 빨래가 마르진 않는다. 습도계의 숫자를 보니 76%. 이러다간 곰팡이가 또 피어버릴게 뻔했다.

6년이 지나는 동안 나는 추운 방 대신 곰팡이를 걱정하는 사람이 된 걸까. “나는 이 놈의 곰팡이..”를 읊조리며 집히는 대로 아무 노래나 틀었다. 아니야 이거 말고. 노래를 계속 바꿔보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어제 들었던 플레이리스트를 다시 틀고 나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존나 춥다..”

창문을 열자 나는 체온유지를 위해 팔짱을 끼고 습도계 숫자가 내려가는지 봤다. 신기하게도 창문을 열면 습도가 뚝뚝 떨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창문을 열면 습도가 쑥쑥 올랐다. 이건 빨래를 널지 않았을 때도 그랬다.

“망할 집구석..”

결로. 결로. 이 단어는 내가 일 년 동안 제일 두려워한 말이었다. 밖과 방의 온도차로 벽면에 물이 생기고.. 하필 구석에 생기면 미처 못 보고 시간이 흐르고.. 그럼 곰팡이가 피고.. 게다가 중앙난방이라 보일러를 빡세게 땔 수가 없었다.

“난 참 겨울이 싫어..”

나는 어제 들었던 플리를 들으며 중얼거렸다. 그러다 “봄이면 벌써 빨래가 말랐을 텐데” 이런 생각을 하며 다시 벌렁 누웠다. 아 이렇게 누우면 작업 못하는데. 그러다가 문득 든 생각. 핸드폰을 보니 12월 31일. 연말 중에 연말이었다.

“빨래와 함께하는 연말이라니 참으로 촉촉하구만.”

하루쯤은 쉬어도 되겠지. 사실 어제도 쉬었지만. 통장 속 돈을 계속 깎아먹고 있었지만 일할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았다. 이런 생각을 하니 왜 곰팡이가 자꾸 내 방으로 기어들어오는지 알 것 같았다. 아, 이 녀석들도 일하고 싶지 않은 걸까. 그래서 결로를 핑계로 무전취식을 하러 내 방에 들어오는 걸까.

“곰팡이가 될 순 없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닫은 뒤 축축한 빨래를 뒤에 두고 작업을 시작했다. 타닥타닥. 나의 갑진년은 꽤나 축축.. 아니 촉촉했을까. 아마도 그렇겠지. 그래도 올해 마지막날은 곰팡이가 되는 걸 피할 수 있어서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새해가 밝았다. 새해벽두부터 성수에 가자는 친구들의 연락. 나는 작업 중인 책이 손에 안 잡히기에 도망치는 마음으로 나왔다. 공휴일 다음날 맞는 평일은 묘하게 늘 이상했다. 졸업유예생 같은 느낌이랄까. 졸업은 안 했지만 학생은 아닌 그런 느낌. 이런 경계에 있어봐서일까. 나는 공휴일 다음날이 되면 졸업유예를 할 때의 기억이 떠오르곤 했다.

낮 12시의 전철. 2호선은 언제나 사람이 많다. 2호선에서 앉아가기 위해서는 늘 주변의 움직임에 집중해야 한다. 심지어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등 뒤까지도. 열심히 주의를 기울이다 보면 순간순간 빈자리가 생긴다. 마침 빈자리 가까이 있는 사람이 자신 뒤쪽에 난 자리를 눈치채지 못했다. 나이스 타이밍. 나는 슬금슬금 걸어가 빈자리에 슬쩍 앉았다.

성수는 얼마 만이더라. 말은 이렇게 하지만 실제로는 몇 개월 안 됐다. 누군가에게 몇 개월은 굉장히 오래된 시간이겠지만 집돌이에게는 이 정도가 기본이니까. 나는 집돌이라 먼 곳을 꺼렸지만 안 간지 몇 개월이 지났다면 그런 마음이 덜했다. 어쩌면 작업이 손에 안 잡혔기에 그저 핑계를 대는지도 모르겠다.

요즘 윤지영의 노래에 꽂혔다. 나는 코로나가 한창이던 몇 년 전에 정말 윤지영의 노래를 많이 들었었는데 요새 다시 듣고 있다. 윤지영의 영상을 보고 또 노래를 듣고 있자니 묘하게 이게 바로 내가 바라던 분위기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맞아 나도 이런 분위기의 것들을 만들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래서 코로나 때 방구석에서 그렇게 윤지영 노래를 열심히 들은 게 아닐까. 흔들리는 전철 진동에 맞춰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윤지영의 음악을 설명한 글 중에 인상 깊은 내용이 있었다. ‘흔들리는 청춘을 잘 표현하는 사람’. 마지막 단어가 사람이었는지 아티스트였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났지만 대략 이런 문장이었다. 나는 그 글을 읽은 뒤 ‘흔들리는 청춘’이라는 단어에 꽂혔다. 그래 맞아. 내가 표현하고 싶었던 건 사실 이거였는데.

이 문장을 본 이후로 계속 생각에 잠기게 됐다. 흔들리는 청춘을 담아내는 글과 영상에 대해서. 그런 글은 신기하게도 지금 작업 중이다. 그렇다면 그런 영상은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 원래 내가 만들고 싶었던 건 흔들리고 방황하던 청춘들의 영상 기록이었는데. 하지만 살다 보니 경로가 틀어지고 다른 것들에 손을 대고 있었다. 이걸 깨닫고 나니 방안의 노란 조명이 유난히 밝은 것처럼 느껴졌다. 별거 없는 무드등이 태양처럼 밝게 보였달까.

선릉역을 넘어가니 전철 안에 빈자리가 늘어났다. 서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여유로운 전동차 안. 순간 정신없는 서울에서 이런 여유를 누려도 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여유롭더라도 전철은 늘 흔들린다. 덜컹덜컹. 어쩌면 내가 기차를 좋아하는 이유는 흔들리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나는 열차가 내는 두구둥 두구둥 소리를 들으면 묘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흔들리긴 하지만 열심히 목적지로 달려가는 열차처럼 나도, 그리고 내 작업들도 그런 청춘을 담아내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전철의 진동을 느끼며 이런 생각들을 했다.

정신을 차리니 지하에 있던 전철이 어느새 지상으로 올라와있었다. 한강을 넘어가는 2호선. 햇빛이 열차 안을 가득 메웠다. 귀에서는 계속 윤지영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밖은 위험하다. 오늘부터 날씨가 추워진다 했으니 더욱 그렇다. 원래 오늘 운동을 마치고 촬영을 나가려 했으나 너무 늦게 일어났다. 나는 평소 같았으면 자책했겠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어젯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한 가지 생각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오늘 나가려는 일정은 영상을 찍기 위해서였다. 흔들리는 청춘을 찍고 싶다고 늘 생각한 덕분에 어떻게 찍어야 할지 어쩌면 좋을지 감은 잡았지만 어딘가 아쉬웠다. 그래서 계속 머리를 굴렸고 이건 이래서 아쉽고 저건 저래서 아쉽고. 이런 식으로 쉽사리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며칠 동안 나는 어떤 카메라를 써야 하며 편집의 효율은 어떻게 가져가야 하며 스케줄 관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하지만 고민의 본질은 하면 할수록 또 다른 고민으로 빠진다는 것. 나는 몇 년째 이 덫에 갇혀있었다. “이 고민만 해결되면 괜찮아질 거야”라는 생각으로 버려진 노끈이 목에 걸린 거북이처럼 번뇌라는 바다를 헤엄치고 있었다.

대부분의 고민은 어떻게 하면 더 좋고 마음에 드는 콘텐츠를 만들까였다. 긍정적인 고민이었으나 이 고민들은 미세 플라스틱처럼 나를 천천히 죽이고 있었다. 당연히 그럴만했다. 나는 시스템도 동료도 없이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기 위해, 표현하고 싶은 걸 표현하기 위해 어떻게든 아등바등하고 있었으니까.

고민의 형태는 대체로 이랬다.

나만의 색이 담긴 콘텐츠를 만들고 싶어 -> 그럼 이런 구성을 하면 좋겠군 -> 하지만 이 구성은 전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넣어야 해서 지속가능성이 적어 -> 그럼 구성을 바꿔야겠군 -> 이 정도면 지속가능한 상태로 내 색을 담아낼 수 있겠어 -> 근데 진짜 이게 내가 원하던 것이었을까?

이런 반복적인 고민을 몇 년. 나는 천천히 지쳐가고 있었다. 스스로에게 한숨이 나오고 진절머리가 나오는 상황.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그렇게 어제도 이전과는 다른 내용이지만 똑같은 형태의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 생각이 머리를 때렸다.

“나는 내가 찍고 싶은 걸 찍고 내가 말하고 싶은 걸 말하고 있는가?”

스스로 생각하고도 충격적인 문장. 나는 이 말에 전혀 아니라고 답했다.

“그럼 무얼 위해 나를 틀에 가두는가? 나는 무얼 보여주기 위해 남들의 생각을 신경 쓰는가? 이 모습이 진짜 나를 보여주는 것인가?”

아니! 아니!! 아니!!!

새벽 두 시. 조용한 빌라촌에서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랬다. 나는 나를 보여주는 것들, 그리고 나의 색이 담긴 것들을 담아내고 싶었지만 정작 내가 찍고 싶은 것과 말하고 싶은 것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만든 것들을 볼 사람들의 시선과 생각만 신경 썼다. 이러면 괜찮겠지 저러면 괜찮겠지 하며 이상한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뭣이 중한디?”

어쩌면 너무 간절해서 그랬을 수도. 나를 담아내고는 싶지만 이걸로 먹고 살 방법을 찾았으면 해서, 창작자로서 실패하는 것이 두려워서, 남들이 내 가치를 알아줬으면 해서. 그래서일까 나는 입으로는 나 자신을 담아낼 것이라 말하면서 실제로는 내가 아닌 남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새벽 두 시반. 이런 생각을 하니 머리가 개운했다. 늘 본질이 중요하다 생각했으면서 정작 본질을 바라보지 못하다니. 헛웃음이 나왔다. 어릴 때부터 내가 무언가를 만드는 이유는 그냥 만드는 것 자체가 좋아서였는데. 그리고 내가 보기 좋은 것들, 내가 원하는 것들을 만들기 위해서였는데.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스스로에게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누군가는 이 결정을 포기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관심을 못 받으니 합리화를 한 것이라고. 그럴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 생각을 하니 자유로워진 기분이 들었다.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랄까. 시선에 집착하지 말자. 관심이 있으면 좋겠지만 너무 목매지 말자. 진짜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할 때 나올 테니까.

운동 후 씻고 나오니 해가 져있었다. 아 오늘도 집에만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나는 원래 집에만 있는 걸 좋아하니까. 원래 같았으면 다음 만들 영상을 위해 움직이고 촬영하면서 이게 맞는지 계속 고민하고 걱정하고.. 나를 담아내려는 영상에 나보다 영상이 우선시 되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개운한 상태로 옷을 갈아입은 뒤 생수병을 들고 물을 마셨다. 그리고 원래 오늘 이런 계획이었던 것처럼 자리에 앉아 글을 썼다. 내가 나로 산다는 게 어려운 거구나. 예전에는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야 공감하게 됐다. 이번 2025년은, 그리고 앞으로는 나와 본질을 잃지 않길. 부디 그러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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